미셀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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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일대기 요약

작성자
hhhh
작성일
2020-01-05 22:31
조회
849

큰스님의 일대기


성철 큰스님은 1912년 임자년 4월 10일에 지리산 골짜기의 깊은 산골 마을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 이씨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꼿꼿한 선비로 알려진 아버지 이상언씨와 어머니 강상봉씨 슬하에 일곱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스님의 속가 이름은 영주(英柱)였습니다.

"우리 마을에 개구쟁이가 하나 있었지. 돈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집 대문 밖에서 동네가 떠나가도록 제 아버지 이름을 부르곤 했어. 그러면 그 부모는 동네가 부끄러워서라도 아이에게 돈을 주었고, 그 아이는 그 돈으로 저 하고 싶은 것을 하고는 했제..." 성철스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 개구쟁이는 뒤에 알고 보니 바로 스님 당신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개구쟁이는 어린아이 처지로는 사기에도 벅차려니와 읽기에도 버거운 책들을 사보려고 떼를 써서 돈을 얻어냈을 터입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세 살 때에 벌써 글을 익혀서 어른들이 보는 책을 읽었고, 다섯 살에는 집안 어른을 따라 백일장에 갔다가 장원을 하였으며, 소학교 때에는 '서유기', '삼국지연의' 같은 중국의 4대 기서를 사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산모퉁이 양지 바른 곳에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읽어내려 간 적도 있었습니다.

"내가 남에게서 배운 것이라고는 소학교 6년과 서당에서 배운 자치통감自治通鑑이 전부여. 그것 말고는 다 혼자 공부해서 알았지."

 

♦ 모든 것을 독학으로

성철 큰스님은 모든 것을 오로지 독학으로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그 만큼 스님의 독서량은 엄청났는데, 그것은 스님 열반 뒤에 발견된 '서적기'만 보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스무 살이던 때에 적은 그 서적기에는 스님이 그 때까지 읽은, 팔십 여 권에 이르는 책 목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따위로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이 주로 많습니다. 이 가운데 순수 이성 비판은 동경 유학생에게서 쌀 한 가마를 주고 얻은 것이라고 하니 스님의 책에 대한 열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스님은 책 읽기에 열중하던 가운데 더러 대나무 숲이나 넓은 밤나무 밭에 나가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생각에 깊이 잠기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읽은 책 내용을 곱씹어도 보고 삶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깊은 명상에도 잠기고는 한 듯합니다.

 

♦ 불교를 접하다.

그러나 스님은 훌륭하다는 동서고금의 책을 아무리 읽어도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른 길을 찾으려는 스님의 정신적인 방황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스님이 보시던 책에는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낙서가 눈에 많이 뜨입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 영원의 문제는 스님이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성철스님은 우연히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 대사의 [증도가]를 얻어서 읽게 됩니다.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듯 했습니다.

"아, 이런 공부가 있구나." 그것은 참으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스님의 서적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때까지 스님은 불교 경전은 한번도 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삶의 근원에 대해서 길을 구하던 청년 시절 머리 긴 속인으로 화두참선을 시작하다가 님은 그 길로 바로 대원사로 갑니다. 영원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구하려고 집을 떠나 깊은 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 대원사에서 동정일여를 체험하다.

성철스님은 대원사 주지 스님의 배려로 그 곳에서 작은 방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영원의 문제를 풀기 위한 참선 길에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사람들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 채, 밤낮으로 정진하였습니다.

"그 때는 지리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고 하여 밤만 되면 모두들 방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 나도 호랑이 밥이 될까 무서워 밤에는 방을 나서지 못했어. 그런데 하루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겁내서 떨고 있는 내 꼴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겁내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그 뒤부터는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잤어.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거든. 그 다음 부터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어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녔어." 스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번 결심하면 번복하거나 멈추는 일없이 그대로 실행하거니와 그런 태산 같은 의지로 정진하여 삼매에 드니 대원사의 다른 스님들이 오히려 혀를 내두르며 속인인 스님을 어려워 할 정도였습니다.

성철스님은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 는 이른바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참선에 정진하였습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그 때에 "정진에 든지 사십이일 만에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고 동정일여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 스물 여섯의 나이에 가야산 해인사 동산 스님에게로 출가하다.

한 속인이 이렇듯 훌륭하게 정진하고있다는 소문은 곧 대원사 본사인 해인사로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1936년 초겨울에 성철스님은 김법린, 최범술 같은 해인사 큰스님들의 권유로 해인사로 갑니다. 그 무렵 해인사에는 당대의 선지식인 동산스님이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을 본 동산스님은 곧 큰 그릇임을 알아차리고, 퇴설당에 자리를 마련해 주며 출가를 권하였습니다. 성철스님은 처음에는 참선만 잘 하면 그뿐이지 승려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형식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결젯날 동산스님의 법문은 성철스님의 마음 자리에 운명의 싹을 틔어 놓았습니다.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 까지는. 그러나 그 길에는 문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길 자체도 없다."

성철스님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여 1937년 정축년 3월에 동산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습니다. '이영주' 라는 속인의 옷을 벗고 '성철' 이라는 법명으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든 것입니다. 이 때에 스님은 이런 출가 詩를 남깁니다.

 

“하늘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

그리하여 성철 큰스님은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계의 큰 산맥을 잇게 됩니다. 그 무렵 한국 불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승풍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피폐해진 이 땅의 불교속에 참선으로써 진리의 문을 열리라는 서원을 세우고서, 여러 이름난 선원을 다니며 화두 삼매의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동산스님을 따라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한철을 나신 성철스님은 같은 범어사 산내 암자인 내원암으로 가서 용성 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그 무렵 용성 큰스님께서는 어떤 스님을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선생, 선생" 하고 불렀는데 성철스님에게 만은 웬일인지 "성철스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철스님이 그 까닭을 여쭈니 "다른 중들은 스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 그런데 너를 대하니 스님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하였습니다.

용성 큰스님은 그렇듯이 성철스님을 미더워 하여 서울로 옮겨갈 때에도 성철스님을 시봉으로 데려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대답은 "예" 해 놓고 용성스님을 부산역까지만 모셔 드리고는 그 길로 줄행랑을 칩니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공부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 였습니다.

 

♦ 출가 3년 만에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마침내 견성을 이루어 깨달음을 얻다.

그 뒤 동화사 금당선원에 이르러 걸망을 풀고 하안거에 들어가 있던 중이었습니다. 대원사 시절부터 계속해서 지녀온 無자 화두를 들고 선정을 닦던 스님은 삼매중에 문득 견성을 이루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동안 참선 정진하는 틈틈이 여러 조사 어록을 섭렵하면서도, 오매일여로 잠시도 화두를 놓지 않던 스님은 마침내 칠통 같은 어둠을 깨뜨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본 것 입니다. 1940년 여름, 스님 나이 스물 아홉일 때입니다.

스물 여섯살에 출가하여 불과 삼 년 만에 깨달음을 얻어 눈부신 법열의 세계로 들어간 스님은 이렇게 오도송을 읊습니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로대 흰구름 속에 섰네"

 

♦ 여러 선방을 다니면서 실망하다.

성철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당신의 경지를 점검하기 위해 운수 납자의 여정에 오릅니다. 처음 발길이 가 닿은 곳은 송광사였습니다. 그 곳에서 하안거를 보내며 보조 스님의 저서를 독파한 스님은, 그러나, "먼저 깨달은 뒤에 닦는다"고 한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 사상에 대하여 아쉬움을 느낍니다.

깨달음이 이루어지면 닦음도 단박에 이루어지는 '돈오돈수'가 참으로 견성의 경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로 성철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사, 수덕사 정혜사, 은해사 운부암, 도리사, 복천암 등지로 계속 발길을 옮기면서 당대의 선 지식들을 만나는 한편 한결같은 자세로 정진을 이어갔습니다.

평생의 도반이 된 자운스님, 청담스님들을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성철스님은 나라 안 곳곳의 선원과 암자를 다니는 동안 깨달음에 대한 인가(印可)가 참으로 가볍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무렵 수행자들은 철저한 깨달음의 경지도 없이 만행이나 기행을 흉내내기가 일쑤였습니다. 선지식들에 대해서도 거듭 실망한 끝에, 결국 성철스님은 당신의 깨달음에 대해 누구에게서도 인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 8년간의 장좌불와 수행  

그러는 사이에 성철스님은 그 수행의 예봉과 다문박식으로 제방 선원에서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특히나 지금도 널리 이야기 되고 있는 그 유명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 정진은 동화사 금당에서 견성한 뒤로 여덟 해 동안 줄곧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그 여덟 해 동안에 밤중에도 잠은커녕 졸음으로 고개 한번 떨구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인가 도봉산 망월사에서 하루 밤을 지낼 때입니다.

그 날 밤도 여느 때처럼 장좌불와로 밤을 지새는데, 마침 망월사에 머물고 있던 춘성 노스님이 "저 철 수좌가 정말 소문대로 눕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면서 좌복 위에 꼿꼿이 앉아 지새는가?" 하여 문에 구멍을 뚫고 날이 새도록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과연 소문대로 좌복 위에서 꼼짝도 않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감탄하여, 그 때부터 춘성 노스님도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장좌불와 수행을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또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정진하던 이야기입니다. 마치 큰 바위같이 아무런 움직임도 흔들림도 없이 참선에 몰두하던 스님에게 하루는 어머니가 그 춥고 먼 곳을 찾아왔습니다.

스님이 "볼 필요 없다"하며 어머니를 만나 주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내려 하자, 선방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 "아무리 우리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수행승이지만 철 수좌는 인정이 너무 없다"면서 어머니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그 곳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도반들에게 떠밀린 스님은 하는 수 없어 어머님을 등에 업고 이레 동안 금강산을 구경 시켜 드렸습니다.

 

♦ 봉암사 결사, 불교 중흥의 길을 마련하다.

그러던 중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해방은 스님들에게 한국 불교의 본래 면목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한국 불교를 살리려면 총림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때 마침 효봉 큰스님이 해인사에 '가야 총림'을 열었으나 청담스님만 참여하고 성철스님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뒤에 두 스님은 다시 논의하여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로 함께 거처를 옮겼습니다. 성철스님은 "이 좋은 도량에서 함께 열심히 정진하자"며 울산에 머물고 있던 향곡스님도 봉암사로 불러들였습니다.

불법을 바로 세우려는 스님들의 청정한 의지가 바로 이 희양산 산자락에서 처음 태동됩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봉암사 결사'가 그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이끈 봉암사 결사는 선종 본디의 종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젊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니 청담스님과 향곡스님을 비롯하여 자운, 월산, 우봉, 보문, 성수, 도우, 혜암, 법전스님 등 모두가 뒷날 한국 불교를 이끌어 나간 굳건한 동량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뒤에 종정 두 명과 총무원장 세 명이 나왔을 뿐 아니라 여러 선방의 조실로 종단의 지도자가 되지 않은 스님이 없었습니다.

지금 봉녕사 학장 스님으로 있는 묘엄스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봉암사의 분위기는 조사의 도량으로서 그 청정한 긴장감이 사뭇 대단했습니다. 法의 구름이 도량을 덮고 있는 듯했지요.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런 전통이 있기에 봉암사는 지금도 일반 사람의 발길을 막아 산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서 결제와 해제가 따로 없을 만큼 꼿꼿한 선풍을 지키고 있습니다.

 

♦ 공주규약 (共住規約)

성철스님은 이 때에 '공주규약(共住規約)' 이라 하여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규칙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는 바로 부처님 법대로 살려는 참으로 엄격한 실천궁행이었습니다.

-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自主自治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며 또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 소작인의 세조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이를 단연히 청산한다.

-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 방 안에서는 늘 면벽 좌선하고 서로 잡담을 엄금한다.

 

♦ 6.25 전쟁

'한국 불교의 르네상스'라고 할 이 봉암사 결사는, 성철스님 생애에서도 퍽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거니와, 오늘날 우리 불교가 지니고 있는 질서와 형식이 거의 모두 봉암사 결사에 뿌리를 두고 있느니 만큼 불교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이루어진 이 중흥 불사는, 안타깝게도 6.25 전쟁 직전에 희양산 일대가 좌익, 우익의 전략 거점으로 짓밟히면서 몇 해 되지 않아 무산되고 맙니다.

좌, 우의 대립이 퍽 심하던 그 때에, 스님이 어쩌다 행각중에 토방에서 장좌불와를 하고 있으면, 밤중에 사람들이 슬며시 찾아와 "앞으로 좌익이 이길까요, 우익이 이길까요? 제게만 살짝 알려 주십시오" 하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한결같이 "나는 사문이라 그런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거나 심지어는 욕을 퍼붓기도 했다고 합니다.

 

♦ 안정사 천제굴 시절, 그 유명한 삼천배 기도를 시키다.

6.25 전쟁 뒤에 성철스님은 월내의 묘관음사에 이어 통영 은봉암에 얼마 동안 머뭅니다. 그러다가 안정사 앞 골짜기에 초가 세 채로 된 토굴을 짓고 천제굴이라고 이름하여 그 곳에 주석합니다. 그 때에 근처의 많은 선남선녀들이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발심하여 출가하는 일이 잇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철스님 믿다가는 집안 망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스님의 법문은 유한한 인생에서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영원한 행복을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는 높고 깊은 설득력을 지녔던 것입니다. 스님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그 유명한 삼천배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을 만나려면 젊은이든 노인이든 재벌이든 장관이든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부처님 앞에서 삼천배를 해야 했습니다. 절은 그 행위 자체가 참회요 공덕인 것입니다. 삼천배는 절을 삼천 번씩 되풀이 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마음의 때를 닦아 없애 나가는 과정입니다.

아마도 스님이 신도들에게 예외 없이 삼천배를 시킨 까닭은, 삼천 번 절하는 동안에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먼지를 닦아 없애서 자기를 바로 보게 하려는 방편에서였을 터입니다. 스님은 또 삼천배 기도 말고도 신도들을 위한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아비라 기도라는 독특한 예불 의식을 만들어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아비라 기도는 삼천배의 예배 절차와 함께 그 뒤로도 줄곧 이어져 큰스님 살아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해인사 백련암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이렇듯 신도들에게 기도를 통한 참회와 수행을 철저히 가르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평생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체 중생을 위한 백팔배 참회 기도를 함으로써 수행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 성전암에 철망을 두르고 십년 동안 나오지 않다.

정화 운동이라 하여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투쟁이 불거지던 무렵입니다. 한평생 수행자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던 스님은 정화 운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절 뺏기 식의 정화가 되어 자칫 잘못하여 묵은 도둑 쫓아내고 새 도둑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그 간곡한 뜻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스님은 1955년 겨울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그 뒤로 십년 동안 한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십 년에 걸친 동구불출(洞口不出)', 8년 장좌불와에 이은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룬 것입니다.

스님은 퇴락한 성전암을 수리 하고는 그 둘레에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렇게 둘러친 철조망 안에서 일체의 바깥 출입을 삼가면서 스님은 차곡차곡 한국 불교의 앞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수많은 불경과 조사어록을 공부함은 물론, 과학과 수학 같은 학문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바깥에서는 불교 정화라는 이름으로 대처승과 비구승의 투쟁이 한창일 때, 스님은 시류를 멀리한 채, 한국 불교의 진정한 내적 정화를 위해 든든한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으니, 곧 뒷날 '성철 불교'라 일컫게 된 독보적인 불교 이론과 실천 논리를 확립합니다.

 

♦ 수도자에게 주는 글 '성팔이 노트'

그 성전암 시절에 불필 스님과 그 도반들에게 공부 잘 하라고 손수 지어 준 글이 있습니다. 이른바 '성팔이 노트'라고 합니다. 그 노트 첫머리에 성팔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성팔이 노트라 한 것입니다. 성팔이 노트는 윤회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성철스님은 평생 윤회에 대해서 많은 법문을 하였을 뿐더러 서구의 과학적 이론이나 실험 사례를 빌어서 윤회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려고 힘썼습니다. 한편 스님의 법어집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나오는 '수도자에게 주는 글' 도 바로 그 노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늘 남에게 미루고 나쁘고 욕되는 일은 남 모르게 내가 둘러쓰는 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이다."

"육조 스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허물만 보고 남의 시비 선악은 보지 못한다 하셨다. 이 말씀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눈이다. 내 옳다는 생각이 추호라도 있을 적에는 내 허물이 태산보다 더 크다. 나의 옳음을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사람이라야 조금 철이 난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에서든지 내 허물만 보이고 남의 허물은 볼래야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내 옳고 네 그른 싸움이니 내 그르고 네 옳은 줄만 알면 싸움이 영원히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깊이 깨달아 내 옳고 네 그름을 버리고 늘 나의 허물, 나의 잘못만 보아야 한다."

 

남 모르게 남을 도우라 - 그 스님에 그 신도

스님은 성전암에 있는 동안에 결제와 해제 앞뒤로 일 년에 네 번은 문을 열어 신도들을 위하여 기도 법회를 열고는 하였습니다. 어느 때에 파계사 큰절 법당이 비가 새어서 주지스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스님은 기도 법회에 온 아는 보살님에게 일렀습니다.

"큰절 법당이 비가 샌다고 하니 보살이 불사를 하지.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있어. 절대 큰절 주지 스님에게는 누가 불사를 하는지 모르게 해야 돼. 사자가 심부름을 해 줄 터이니 보살이 돈 들고 직접 나서지는 말어." 그렇게 해서 그 보살은 남 모르게 큰 법당 불사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성전암에 기도하러 오는 길에 불사가 잘 되었나 하는 마음에서 큰절에 들렀습니다. 보살은 새로 고친 법당에 올라 108참회의 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절을 하고 있는데 웬 스님이 들어오더니만, "웬 보살이 스님 허락도 없이 큰 법당에 들어와 멋대로 절을 하느냐"고 큰소리로 호령하며 꾸짖더니 그만 보살을 내쫓고 말았습니다.

그 보살은 그 길로 성전암에 올라와서 성철스님에게 말했습니다. "큰스님, 정말 오늘 제 마음이 한량없이 기쁘고 깨끗합니다. 큰절 법당에서 허락 없이 절한다고 쫓겨났습니다.

그 스님이 제가 불사 시주를 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잘 대접한다고 얼마나 법석을 떨었겠습니까? 오늘 대접 받고 올라오는 것보다 박대 받고 올라오는 이 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참 불사지." 성철스님의 한마디였습니다. 참으로 '그 스님에 그 신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법연 선사가 말씀하셨다. '이십 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하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겠다.' 내 잘났다고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추는 어리석음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 말씀이다." 이렇듯 그 내용은 수행인으로서 지녀야 할 하심(下心)과 도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그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해인 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 '백일법문'을 설하다.

1965년 성철스님은 마침내 굳게 닫은 성전암 문을 열고 나옵니다. 그 길로 김용사에서 대중들을 모아 놓고 스님의 사상을 거침없이 토해 내기 시작하니 그것이 대중 앞에서 한 최초의 법문이었습니다. 십 년 동안 걸어 잠근 문을 열자 자운스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운스님은 성철스님을 설득하여 해인사의 백련암으로 모셔갔습니다. 자운스님은 봉암사의 결사 의지를 되살리며 청담스님과 함께 해인사를 총림으로 키우는 데에 뜻을 모았고, 성철스님은 그 뜻을 받아들여 1967년에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성철스님은 그 해 겨울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석을 열어 사부대중을 위해 하루 두 시간씩 일백일 동안 법문을 하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일법문'입니다. 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하여 흐트러진 불교 교리를 정리하여 집대성하고 조계종의 법맥을 바로잡고 나아가 선종의 핵심 사상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습니다.

곧, 불교의 근본 진리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한 종지는 돈오돈수에 있음을 천명하는 한편 불생불멸의 진리는 원자 물리학이나 양자 역학에서도 입증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불교의 근본 진리는 중도에 있다.

"부처님이 뭐라고 했냐 하면, 나는 모든 양변을 버린 중도를 깨달았다. 이렇게 선언을 했어요. 양변을 버리니, 곧 생멸(生滅)도 버리고, 나고 죽는 것(生死)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有無)도 버리고,

착하고 악한것(善惡)도 버리고, 옳고 그른 것(是非)도 다 버렸으니,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무엇이냐, '절대'다 이 말이여. 그래서 나는 상대 세계를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해탈 성불이야.

생각해 보아라. 너희는 고행주의 아니냐. 또 세상은 모두 환락주의 아니냐. 너희들은 환락을 버리고 고행을 하니 가장 착한 것 같지만 변은 둘 다 똑같다. 결국은 참으로 해탈을 하려면 고행도 버리고 환락도 버려야 한다. 두 가지를 다 버려야..." 일체가 불생(不生)이요, 불멸(不滅)이라는 것입니다.

일체가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니, 사람도, 짐승도, 초목도, 돌도, 허공도, 해와 달도 전체가 모두 불생불멸이지 생멸은 없습니다. 성철스님은 불생불멸의 중도법문을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를 들어서도 재미있게 설명하였습니다. "과학만능 시대인 만큼 중도를 과학적으로도 좀 근사하게 풀이해 보자, 이 말이여. 그럼 불생불멸하고 과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원자 물리학에서도 실질적으로 불생불멸을 실험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어. 그게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등가원리지. 등가원리는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와 같다는 거지.

그래서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거야." 유형의 질량과 무형의 에너지가 같다는 등가원리는 유형, 무형의 형이 바뀐다 해서 그 본질이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생불멸,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설법과 결과적으로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또 달리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은 모양이 바뀐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은 식이여.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질량은 얼음에 비유하거든. 물 한 그릇이 얼음이 되었거든. 물 한 그릇이 얼음 한 그릇이고 얼음 한 그릇이 물 한 그릇이지."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고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하는데, 色이라는 것은 유형을 말하고 空이라는 것은 무형을 말한다, 이 말이여.

그저 입으로만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니라, 실제 자연계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지. 이런 이론을 우리 불교에서는 중도법문이라고 해. 중도법문!" 부처님의 일대 사상을 중도(中道)로써 전한 백일 법문으로 한국의 불교는 선종, 교종 할 것 없이 모두가 불교의 사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되었습니다.

 

♦ 이기주의에 젖은 중생들에게 연기법칙을 설명하다.

마음의 눈을 가리는 세 가지 독은 욕심 내고, 성 내고, 어리석은 것인데, 그 가운데 탐욕이 근본이며 탐욕은 이기주의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무한 경쟁의 이 시대에 나만 잘 살아보자는 이기주의가 성성합니다.

이기주의에 젖은 중생들에게 스님은 일체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두 막대기가 서로 버티고 섰다가 이쪽이 넘어지면 저쪽도 넘어지는 것과 같이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이쪽을 해치면 저쪽도 손해를 보고 저쪽을 도우면 이쪽도 이익을 받으니, "참으로 내가 살고 싶거든 남을 도우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은 본디부터 한 뿌리로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의 법칙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가 짖고 자기가 받으며, 몸을 바로 세우면 제 그림자도 발라지고 몸을 구부리면 그림자도 구부러지듯이 바른 업을 지으면 모든 생활이 발라지고 굽은 업을 지으면 모든 것이 굽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모든 행,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주의와 물질문명에 병든 이 사회에 스님의 그 말씀은 청량한 법음이었습니다

 

♦ 영혼의 존재와 윤회를 과학적으로 설명

스님은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이 자연계가 무상하기 짝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 어디로 가게 되는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그 영혼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면 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스님은 영혼의 물질화와 영혼 사진, 정신 사진을 찍는 데에 성공한 사례를 들며 영혼 불멸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며 정신 에너지는 살아서나 죽은 뒤에나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윤회(또는 재생)하며, 영혼이 다시 몸을 받아 태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며 더우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란 사막에서 풀잎 얻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 했읍니다.

그래서 몸을 받지 못한 수많은 영혼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으며, 윤회는 지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윤회하는 근본 원칙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업에 끄달려서만 된다고 하였습니다. 곧, 착한 일을 많이 했으면 행복한 내생이 되고 악한 일을 많이 하면 불행한 내생이 된다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법칙에 따라 윤회하는데, 그런 사실이 과학적으로 판명되었음을 또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고리에 갇혀서 억겁을 두고서 나고 죽는 고통스런 순환을 되풀이하면서, 인간으로, 동물로, 미물로, 때로는 초목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 마음의 눈을 뜨고 지혜의 광명을 보면 내가 부처요, 이 사바세계가 극락이다.

마음을 가리고 있는 번뇌의 구름을 걷고 지혜의 광명을 볼 때 중생들은 비로소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는 대해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스님은 또한 일러주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 윤회를 벗어난 영원한 자유와 절대적 행복이 있으며 이 광명은 영겁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요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중생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떤 방법으로 될 수 있는가요? 스님은 거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화두참선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일상과 몽중과 깊은 수면의 경계에서도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여 근본 무명까지 없어진 구경에 이르게 되면, 마음에 쌓인 먼지가 다 없어져서 본디부터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불성 곧 자신의 부처를 자기의 힘으로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화두를 참구하여 자기의 본디 면목을 보려면 첫째, 잠 많이 자지 말라, 둘째, 말 많이 하지 말라, 셋째, 책(경전)을 보지 말라, 넷째, 간식하지 말라,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는 수좌 5계를 남기셨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욕심 때문에 마음 거울에 때가 묻었으니 욕심이 다 없어지면 결국 마음의 거울의 때가 하나도 없어져서 자기의 본디 면목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이 번뇌 망상, 그 먼지만 닦아내면 내가 바로 부처며, 이 자리가 극락이라고 하면서 중생과 사바 세계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 조계종 종조를 바로잡고, 선가의 오랜 가풍인 '돈오돈수'를 설파하다.

스님은 또한 조계종의 종조 문제를 대담하게 제기합니다. 1950년대 정화 운동 뒤로 새롭게 자리 매김하려던 '보조스님 종조설'을 전면 부인한 것입니다. 한국 불교의 종조는 본디 태고 보우국사 스님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철스님은 한국불교가 조계 혜능스님을 원조로 한, 임제종의 법통을 이은 선종이며, 종조는 태고 보우국사임을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성철스님은 종조 문제와 돈수, 점수 논쟁으로 한국불교 조계종이 모두 우러르는 고승 보조스님과 대립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보조스님은 선과 교를 융합시키려고 힘썼으나 그 결과 교가적인 돈오점수 이론을 선가의 종지로 내세우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한국 불교는 언제부터인가 점수 사상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성철스님이‘돈오돈수를 설파하기 시작하자, 한국 불교계는 한동안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나중에 오매일여가 되고 안팎이 명철해져서 거기서 한 눈 뜨면 깨친 것이지, 견성이지. 그러기 전에는 병난 거여." 화두를 참구해서 마침내 아주 작은 망상까지도 없어진 구경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본원 자리에 단박 깨달아 들어가는 돈오돈수가 선종의 본디 사상인 것입니다.

이에 성철스님은, 선사들의 어록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한 '선림고경총서' 37권을 내어, 돈오돈수 사상이 비단 스님만의 주장이 아니라 역대 선사들의 오종 가풍임을 밝혔습니다.

 

♦ 불교 중흥을 위해 종정에 취임

큰스님께서 해인총림 방장으로서 백련암에 머무는 동안 해인사는 눈에 띄게 그 면모가 새로워졌습니다. 큰절과 산내 암자가 크게 발전하였는가 하면 선원, 율원, 강원을 두루 갖춤으로써 명실상부한 총림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서릿발 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임으로써 청정한 수행 도량을 이루니 오백 여 명에 이르는 산중 대중이 부처님의 혜명을 이으려고 밤낮없이 정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불교는 또 한 차례의 거센 부침을 겪어야 했습니다. 해방 뒤로 시작된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분규와 조계종 내부의 종권 다툼으로 승려들의 기강이 크게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군부는 또 다시 정화라는 이름으로 세속의 칼을 들이대었습니다.

그것이 현대 한국 불교의 최대의 치욕이라 하는 1980년 10.27 법난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위기의 국면으로 빠져 들고 있던 한국 불교계가 그 때에 선택한 분이 바로 성철 큰스님이었습니다. 큰스님이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불교를 받쳐줄 기둥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내 이름을 빌려주어서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제7대 종정직을 수락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던 성철 큰스님은, 이 때에 취임법어 하나로 대뜸 세간을 술렁이게 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가야산 해인사를 떠나지 않은 '가야산 호랑이'

"종정 안 한다는 말만 하지 말라고 해서 종정이 되었으나 산중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스님은 종정 취임식 날에도 서울의 취임식장에 가지 않았을 뿐더러, 1991년에 다시 제8대 조계종 종정에 재 추대되어 입적하기까지 끝끝내 산승이기를 고집하여 평생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일찍이 그 박학다문함과 장좌불와 8년, 동구불출 10년 같은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거니와, 또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으로써 이 땅의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성철큰스님은, 1967년 이후로 줄곧 가야산 해인사를 지켜오는 동안에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습니다.

공부하는 대중 스님들을 늘 잔뜩 긴장시키던, 그 불길 같고 서릿발 같은 가르침의 엄격함 덕분에 얻은 이름입니다. 정진 중에 어느 스님이 잠깐이라도 졸음에 빠질라치면 이내 "이 도둑놈아, 밥값 내 놔라!" 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등줄기에 장군죽비가 날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며 짐짓 장난스러운 면모도 드러내고는 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퍽 좋아하여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꼭 천진무구한 아이 같았고, 도반들과 함께 있을 때면 씨름을 하기도 하면서 짓궂은 장난을 예사로 하였습니다. 법문 사이에 끼어 드는 우스갯소리도 여간 구수하지가 않았습니다.

 

♦ 청빈한 수행 납자로서,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

또 큰스님은 "도를 이루려면 가난부터 배워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식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며 소식으로 일관해왔는가 하면,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내는 청빈한 삶을 이어 왔으니, 그나마 그 한 벌 옷도 여든 나이가 되도록 손수 기워 입었습니다. 스님을 찾아온 어느 기자와의 대화 한 자락입니다.

"스님, 입고 계신 옷이 저희가 보기에는 상당히 남루하고 누더기입니다만 몇 년 동안 입으셨습니까?"

"30년 넘었어. 이 옷이 두 갠데 번갈아 가며 입어. 30년 넘었어. 거의 40년 됐어."

"평상시에 안 입고 예식 있을 때에만 입으십니까?"

"장 입고 다니는 옷이라."

"늘 입고 다니시는 옷이군요."

"오늘 특별히 입고 나온 줄 아는 모양이네. 나 장 입고 다니는 옷이야."

"......"

"나 제일 못났기 때문에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어. 아무 자격이 없는데 좋은 옷 입을 수가 있나."

그러나 큰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 말에 속지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 1993년 11월 4일 처음 출가한 그 방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다.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 나서 두 달 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그 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의 길에 드니, 행운유수(行雲游水)의 사문의 길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랍 59년, 세수 82세로 큰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적멸에 든 큰스님은 입적한지 이레째 날 평생을 주석한 해인사 퇴설당을 떠나서 일주문 밖에 마련된 연화대로 향하였습니다. 그 날, 퇴설당 위로는 일시에 새떼가 날고, 다비장에서는 때늦은 낙엽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습니다.

스님 떠나던 그 날도 그러더니,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는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환한 빛이 피어올랐습니다. 이는 드물게 보는 방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 여 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를 남겼습니다. 다비식에서 사십구재에 이르는 동안 큰스님의 떠남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뭇 대중의 발길은 해인사 앞뜰을 가득 메우며 끊일 줄 몰랐습니다.

 

♦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전의 가르침

성철 큰스님은 속인으로 왔다가 끝내 부처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부처’로 불리는 까닭은, 오직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용기, 그리고 그 결의를 평생토록 지킨 남다른 실천궁행 때문입니다.

큰스님 가고 없는 가야산, 그러나 한평생 오롯한 선승의 길을 걸어 온 큰스님의 자취는 지금도 매서운 죽비소리가 되어서 날마다 새롭게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남 모르게 남을 도우라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참회하고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누누이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으로 울리고 있습니다.

모든 불자님들 성불하십시오.

 

▢ 큰스님께서 머문 사찰

- 경남 산청 대원사

- 경남 합천 해인사 퇴설당, 백련암. 대적광전

- 경남 양산 통도사 백련암

- 경남 고성 문수암

- 경남 통영 안정사 은봉암 근처 천제굴

- 경남 남해 용문사 백련암

- 부산 범어사

- 부산 기장 묘관음사

- 부산 해월정사

- 경북 영천 은해사 운부암

- 경북 선산 도리사 복천암

- 경북 문경 대승사

- 경북 문경 봉암사

- 경북 문경 김용사

- 대구 동화사. 금당 : 견성(見性)하다

- 대구 파계사 성전암 1955년~10년간 동구불출(洞口不出)

- 전남 순천 송광사

- 충남 예산 수덕사 정혜사

- 충남 서산 간월암

- 충북 보은 법주사 복천암

- 서울 도선사

- 서울 도봉산 망월사 “ 장좌불와”

- 금강산 마하연

(본 글은 http://blog.daum.net/yukinongup에서 발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