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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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 도인처럼 살다 떠난 어머니 (김복자)

작성자
hhhh
작성일
2023-02-03 21:05
조회
323


도인처럼 살다 떠난 어머니,


불자 인연 맺어준 참 스승이었네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면 신중전의 그림이 무서워서 절에 가는 것이 싫었다. 어머니는 가을 추수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부처님 전에 올리는 쌀을 챙겼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미는 깨끗해야 한다면서 정성들여 챙겨두셨다가 4km가 넘는 거리를 먼 거리를 공양미를 이고 절에 가셨다.

나는 8남매에 3째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스무 살 무렵 도시에 살고있는 오빠 집으로 가서 살게 됐다. 오빠 집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성당이 있었는데 당시 하얀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그래서 성당에 다니고 싶었다.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는 말리셨다. 지금 당장은 다니지 말고 나중에 결혼한 다음에 성당에 가라는 만류에도 나는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영세를 받는 것은 무척 까다로웠다. 성당에서는 320개의 문답을 다 외워야만 영세를 받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래서 열심히 성당을 다니며 문답을 외웠다. 매일 저녁 수녀님과 마주앉아 확인을 받았다. 정말 밤길 무서운 줄 모르고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320문답을 다 외워 확인받고 영세 받을 날을 정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영세 받을 날을 며칠 앞두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간밤에 꿈을 꿨는데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무서운 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당 쪽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수녀님에게 말도 없이 성당에 발을 끊어버렸다. 생각하면 그때 수녀님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죄송한 마음이 든다.

나는 29살에 결혼했다. 큰언니가 결혼해서 고려당이라는 제빵 집을 할 때 그곳에서 매상 관리를 해준 적이 있다. 그곳에 손님으로 다니던 사람이었다. 결혼 조건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8남매의 장남에 종가댁이어서 집안의 대소사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결혼하면 고생길이 눈앞에 훤했다. 언니와 오빠는 여러 조건이 괜찮은 사람들을 소개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곳에 가서 봉사 활동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한번 닿은 인연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하고부터 시련이 닥쳐왔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어떤 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래서 물었더니 결핵약이라고 했다. 당시 결핵은 엄청나게 큰 병이었다. 남편은 결핵으로 이미 너무 야윈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병이 심하니, 방은 물론 가재도구도 따로 써야한다고 말했다. 신혼 3개월 단칸방에 살고 있던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의사의 말을 그저 한귀로 흘려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결심했다. 반드시 남편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병에 좋은 것이 있다고 하면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남편의 상태는 갈수록 좋아졌다. 그 후 3개월마다 검사를 했는데 병은 호전되고 있었다. 체중도 늘었다. 그래도 결국 아이를 갖고 출산을 하는 기쁨을 맛보게 됐다. 그러나 정상 분만은 못하고 수술을 통해 아이를 품에 안게 됐다.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 준 아이가 고맙기만 했다. 힘들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작은 기쁨들을 알아가려는 찰나, 이번에는 시골에 계신 시어머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검사를 하니 배 안에 어른 주먹 크기의 혹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그래서 급하게 수술을 하고 병수발을 들었다. 신혼 초부터 시작된 시련은 힘들었다. 결혼 전에 모아두었던 것을 쪼개 쓰며 열심히 살았지만 너무나 힘든 삶에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를 뵙고 하소연을 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나에게만 오느냐고 울었다. 친정어머니도 나의 이런 처지를 충분히 알고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내 말을 듣는 친정어머니는 속으로 얼마나 아프셨을까 죄송스런 마음이다.

친정어머니는 이제라도 절에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그리고 절하는 방법 등을 자세히 알려줬다. 그 후로 틈나면 절에 갔다. 신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지만 절에 다녀오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몸도 편했다. 그러나 집 주변에는 변변한 사찰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오신날 방송을 통해 법요식을 보다가 불현듯 성당 다닐 때 꿨던 그 무서운 꿈이 떠올랐다. 그래서 무서웠지만 꿈에 나왔던 신장님들이 있던 그 절이 있다면 가보고 싶었다. 친정어머니께 이야기했더니 그러면 내가 다니는 절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친정언니를 따라 그 절에 가게 됐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꿈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순간이었다. 아마도 이곳으로 이끌기 위해, 꿈에서 그리 무서운 모습으로 나오셨나보다. 그 이후로 정말 열심히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법당에 서서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먼저 나의 허물을 살펴보고 용서하게 됐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절에 가는 날이 늘었다.

서초동에 있을 때 수안사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구룡사로 능인선원으로 가까운 절들을 열심히 다녔다. 그래서인지 집안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그리고 구룡사 근처로 이사를 온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불교공부로 이어졌다. 기도만 할 줄 알았지 불교는 잘 몰랐지만 도반과 함께 불교대학을 접수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열심히 배웠다. 환희심이 절로 났다. 부처님 말씀을 전해주시는 스님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삶은 온통 행복과 즐거움이었다. 불교공부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나에게는 생명수와 같았다. 대학입시가 제대도 되지 않아 힘들어했던 아이들도 대학 진학 후 입대를 하거나, 외국에 연수를 떠나기도 했다. 새벽에 삼천배를 하고 산에 올라 도심을 바라보며 국민들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발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쳐왔다. 신혼 초부터 결핵으로 고생을 했던 남편은 당뇨가 무척이나 심했다. 그런데 남편이 이번에는 수술도 할 수 없는 간암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때의 심정은 다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수술 대신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횡단보도를 한 번에 건너지 못하고 중간에 쉬었다가 건너야 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그래서 오로지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했다. 약이 있는 곳만 알려주시면 어디라도 찾아 갈테니 제발 알려달라고 눈물로 절을 하면서 기도했다. 108배를 기약하고 절을 하면 나도 모르게 수백배의 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시숙 친구 동생이 중국 병원에서 근무하는데 한국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중국으로 한번 와보라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중국에 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치는 곳이 있으니 한번 가보자고 했다. 의료수준이 떨어지는 곳에서 무슨 병을 고치겠냐는 남편은 반대했다. 겨우 설득해서 중국으로 갔다. 그곳은 약으로 정상세포를 강화해서 병을 자연적으로 치유하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병원은 깨끗했다. 암환자라고 특별하게 관리하는 것은 없었다. 아침저녁 공복에 의사선생님이 가루약을 직접 타주셨다. 그런데 중국 병원에 입원한지 불과 3일 만에 수치가 약간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을 꿨다. 관세음보살님께 약을 얻는 꿈이었다. ‘이제는 살았구나’ 깨자마자 관세음보살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 후 남편의 병은 놀랍도록 호전됐다. 20여일이 지난 후 한국에서 검사를 하니, 의사선생님이 도대체 무엇을 먹었는데 이렇게 좋아졌냐고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 후 완전히 완치돼 10여년 넘게 잘 살다 육신을 벗었다.

육신을 벗을 당시 신장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간단한 수술이라고 듣고 들어갔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수술을 세 번이나 해서 의사를 상대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친척들이 난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냥 조용히 하자고 설득했다. 떠난 자리를 시끄럽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가고 옴이라는 것이 본래 없는 집착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죽음을 마주하며 불현듯 도인처럼 떠나신 친정어머니가 떠올랐다.

평생을 독실한 불자로 사셨던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혀 아픈 곳이 없으셨다. 친정어머니는 간밤에 주무시는 아버님을 깨워 “나 갈테니 잘 있으라”고 말씀하시곤 주무시는 모습 그대로 떠나셨다. 아버지가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나 이제 간다니까” 하셨다. 친정어머니의 죽음 이후 나는 1년을 넘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시고 나니, 살아계셨을 때의 그 지극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수시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또한 나의 욕심과 집착이었다. 눈물도 슬픔도 본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슬픔은 잦아들었다.

내 나이 79세,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돌이켜보면 모든 순간이 한순간 지나가는 영화필름과도 같다. 아니면 오랜 시간 꿈을 꾸고 난 뒤 이제 막 깨어난 아침이라고나 할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감사한 일뿐이다. 화엄사를 참배하고 해질 무렵 한밤중에 노고단에 올라 도반과 함께 아름다운 계곡을 내려다보며 느꼈던 감사함, 남편이 유명을 달리하기 1년 전 봉정암에서 함께 자고 내려올 때의 고마움, 욕심을 버리고 나를 비우면 항상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된다. 불교를 만나고 그 가르침을 배우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다. 부처님 법 안에 우리 모두 함께 하나 되어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길 기도한다.


법보신문 신행수기 당선작


불교방송 사장상 - 김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