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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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과 참여 : 우리들의 A.D. (After Death) - 김형민 PD

작성자
hhhh
작성일
2019-01-01 16:37
조회
933


우리들의 A.D. (After Death)



크리스마스입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 날은 예수 탄생일이 아닐 가능성이 99%지만 근 천 수백 년 동안 이 날은 아기 예수의 생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서력 기원 역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점으로 삼으니 예수 탄생은 B.C. (Before Christ)와 A.D. ( Anno Domini 주의 해, 주 후)의 기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아닐까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는 것은 어차피 믿음의 영역입니다만, 그 수제자마저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을 만큼 지리멸렬했던 예수의 제자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맹렬한 선교에 나선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독교는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우리 역사라고 다르겠습니까. 우리 역사 속에서도 예수와 같은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신성모독이라고 발끈하시는 분들을 위해 추가로 설명을 얹자면, 죽음으로 역사의 빛이 되고 그 빛의 전파를 통해 역사 속에서 부활한 사람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그들의 삶을 바꾼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A.D (After Death)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1970년 11월 14일 , 그러니까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전태일이 불덩이가 된 다음 날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이상현 기자는 전태일의 장례식을 취재하며 문상객 방문록을 뒤적이다가 머리를 해머로 치는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문상객 방문록은 낡아빠진 대학 노트였는데 조문객들의 명단 앞에 뭔가가 빼곡이 적혀 있었던 겁니다.

달필이라기보다는 악필에 가까웠지만 또박또박 읽을 수 있었던 노트의 내용은 이상현 기자를 흥분시켰습니다. 그건 전태일의 일기였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태일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그릴 수 있게 해 준 일기장 말입니다. 다음날 주간조선은 역사적인 대특종을 터뜨립니다.

전태일의 처참한 죽음을 통해 그만큼이나 참혹했던 평화시장의 현실과 그곳을 어떻게든 바꿔 보겠다고 발버둥쳤던 전태일의 삶이 알려지면서 어떤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전율합니다. 어려운 한자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며 “대학생 친구 하나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되뇌던 청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서울 법대생들이 달려옵니다. 후일 엄혹한 수배 기간에 전태일 평전을 써내 전태일의 생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조영래 등이었죠.

전태일이 입술 깨물며 호소하던 하느님을 함께 섬기던 이들이 전태일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의 무심과 게으름의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1970년 11월 22일 새문안교회 청년들은 예배 이후 전태일의 분신자살에 대한 '참회와 호소의 금식기도회'를 엽니다. "분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을 외면하고, 교회여! 무엇을 하려는가. 회개하라!" 다음날 23일, 개신교와 천주교는 공동 추모 행사를 열었고 여기서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자신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한 것이 어찌 기독교인들 뿐이었겠습니까. 좌절되긴 했으나 대학생불교연합회 경북지부는 가톨릭과 개신교 학생회와 손잡고 추모식 개최를 시도했고 전태일의 남은 동료들은 당국과 업주의 탄압을 뚫고 청계피복노조를 조직합니다. 평범한 이웃 아주머니 같았던 전태일의 어머니는 그 후 전태일의 ‘바울’이 돼 일생을 아들의 뜻을 펼치며 일생을 살았고, ‘한국의 예수’의 거룩한 삶과 죽음에 감화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의 궤도를 수정했습니다.

1988년 열 다섯 살 노동자 문송면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합니다.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갑작스레 찾아든 괴질에 고통받았지만 수은 중독이라는 사실도, 그것이 산업재해라는 것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산업재해를 인정받고 지정 병원인 여의도 성모 병원으로 옮겨진 지 이틀만에 문송면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송면 케이스를 맡았던 것은 김은혜 당시 구로의원 상담실장이었습니다. 수은 중독이 이슈가 되자 그에게는 엄청난 전화가 폭주합니다. 수은을 다뤘던 노동자들이 “나도 그렇다!”고 아우성치는 전화였지요. 그 전화 폭주 와중에 김은혜는 문송면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전태일의 외침은 “송면이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는 사람들의 다짐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청소년들의 인기 만화 잡지 <보물섬>에 고 신영식 화백이 다룬 문송면 이야기가 실렸고 KBS의 김종식 PD는 “이게 무슨 드라마냐. 교양국에나 가라.”는 힐난을 뚫고 <송면이의 서울행>이라는 다큐드라마를 만듭니다. 문송면의 죽음을 날카롭고도 절절하게 세상에 고발했던 사람 중 하나는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문송면이 돌아간 엿새 후, 노무현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렇게 분노의 열변을 토합니다.

“지난 7월 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15세 된 소년 근로자가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직업병에 대비한 의료체계의 미비, 수은중독임이 밝혀진 이후의 회사의 비정한 처사와 노동행정관청의 태만을 따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또래의 제 자식놈은 아직 공부조차 힘이 들어서 온갖 응석이나 부리고 있는 철부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죽은 이 소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나이에 멀리 서산에서 서울까지 부모 슬하를 떠나온 것만 해도 애처로운 일인데 그런 어린아이가 귀중한 생명이 좀먹어 가는 그 위태로운 작업장에 방치되고 끝내 목숨까지 잃게 한 책임은 결국 무능한 그의 부모만이 져야 되는 것입니까?"

작지만 큰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은 1988년 7월 23일 문송면 사건 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던 개인과 단체들이 구리노동상담소의 제안으로 구리 지역에서 악명이 자자하던 원진레이온 대책 위원회를 결성한 일이었습니다. 원진레이온은 국내 유일한 비스코스 인견사 생산 공장이었습니다. 1964년에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중고 기계를 들여와 가동을 시작한 이 공장에는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안전설비가 결여된 채 수많은 노동자를 이황화탄소(CS2)에 노출시켰지요.

속출하는 직업병 의심 노동자들에게 회사는 사직을 강요했고, 유해한 작업환경은 시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진대책위에 가족들이 합류하여 원진가족 대책위원회로 거듭난 뒤 노동자들은 결사적인 투쟁에 나섭니다. 구리 지역 평민당 점거 농성을 시작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던 원진대책위원회는 옥쇄에 가까운 전술 하나를 채택했습니다. 춘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성화 봉송로를 점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88 올림픽에 목숨을 걸었던 정부는 기겁을 했고 부랴부랴 대화에 나섭니다. 오불관언이던 노동부가 회사를 압박하여 테이블로 끌어냈고 그렇게도 안되는 게 많았던 요구들이 선선히 받아들여졌으며 9월 14일 원진레이온 사태의 중대한 계기가 되는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죽은 문송면이 죽어가던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을 살린 것이죠.

예수의 복음이란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따위의 무당 주문이 아닐 겁니다. 예수는 신분과 혈통을 넘어선 사랑을 촉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천국을 전파했던 사람이니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천국에 간다면 부자 청년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네가 천국 가는 것보다 쉽다.”는 예수의 말에 어깨를 늘어뜨릴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며칠 전 김용균이라는 젊은이가 문송면만큼이나 참혹하게, 전태일만큼이나 산업 현장에서 외롭게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막막합니다. 이제는 서울 법대도 없지만 서울법대생이 현장으로 찾아갈 것 같지도 않고, 하다못해 해당 공장의 정규직이랍시는 노동자들도 그 죽음에 책임을 느끼기는 커녕 방관할 뿐입니다. 사고 난 지 며칠 동안 그 공장의 노조 홈페이지에는 임금 교섭 내용만 그득했습니다. 수은 중독의 문송면이 감당해야 했던 회사와 정부의 무관심은 오히려 더 높고 차가워진 벽으로 장성(長城)으로 솟아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 가운데 조영래가 나오고, 김은혜가 출현하고, 노무현이 나타나기를, 원진대책위처럼 용감하고 정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접었던 전태일의 후예들처럼 넉넉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것은 죽음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죽음의 의미를 전파하며, 막을 수 있는 죽음을 막고 피할 수 있는 죽음을 피하도록, 그리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역사 속에서 부활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일일 겁니다. 그를 알려 준 예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글쓴이 : 김형민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