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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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기 : 박태환

작성자
hhhh
작성일
2019-06-22 13:38
조회
803

신행일기—성철스님과 만남 (박태환)


내가 스님을 처음 접했던 걸로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짝에서 빌린 오렌지색 커버의 '심청전"에서 이다. 길지 않았던 심청전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심봉사가 눈을 뜰 때도 아니고 심청이가 왕비가 될 때도 아닌 심봉사가 개울에 빠져있을 때 지나가던 스님이 지팡이로 심봉사를 구해주는 장면의 삽화였다.

그때 스님을 처음 보았다. 그리하여 스님은 심봉사에게 공양미 3백석 이야길 하게 되니, 착한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게 되는데 심청이가 죽게 되는 건 순전히 스님 때문이라며 스님을 미워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부처님이 누구길래 쌀을 3백석이나 드려야 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그 후 수 십 년이 지난 어느 해 초겨울 나는 또 다른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책이 아닌 신문에서였다. 성철스님 이다. 열반소식을 알리는 신문에서 흑백사진의 스님 모습은 적잖이 수줍어 보였고 둥그런 얼굴에 한 치의 틈도 허락치 않을 듯한 당당함으로 세상을 넘어보는 거만함은 불을 품은 산호랑이 모습이셨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일본 유학생에게 쌀 한가마니에 사서 읽었노라 하시며 기자의 깨달음의 질문에 "니 말하면 아나. 장님이 단청보기제" 라고 일축을 놓으신다. 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장사 잘하는 사업가 여~" "세상살이 서푼어치도 안 되련만, 내 장사가 최고 제~" 하신다. 무엇이 이렇게 그를 자신 있게 만드는 것인가. 겸손이 주는 미덕보다 더 아름다운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 차디찬 당당함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걷잡을 수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는 수 십 년의 나의 삶을 깊은 혼돈으로 내몰아치며 평소의 의문을 불거져 터지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를 수 십 년씩 산에 가둬둔 걸까. 무엇이 찾아온 노모를 차갑게 보냈던 걸까. 도대체 불교란 무엇인가. 갑자기 스님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무도 내가 스님을 그리워하는 잿빛의 탄성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스님을 꿈에 뵈었다. 스님은 한문 석자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3일 동안 꿈에 나오셨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스님의 열반다비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다비식과 함께 스님이 거쳐하시던 암자가 소개 되었는데 소개된 암자이름은 꿈에 스님이 보여주신 한문석자와 똑 같은 글씨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스님의 많은 저서와 근본불교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나간 불교잡지 2년걸 구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불교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난해한 교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이해와 더불어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정 어려웠던 것은 불교이론에 대한 믿음의 문제였다. 형이상학이라면 온통 형이상학인 불교이론을 믿는다는 것은 그동안 이분법에 길들어져있는 사고를 배반하지 않는 한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해갈수록 믿음은 깊어지니 생각은 긴 밤이 지루하지 않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이 없었다. 어려운 부분은 이해될 때 까지 몇 번이고 읽었다. 덕분에 막혀있던 공부가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양철학에서도 풀리지 않았던 인식의 문제는 ‘구차제정’에서, 존재의 문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설’과 ‘연기설’에서, 그리고 가치의 문제는 ‘사성제’와 ‘팔정도’에서 그동안 고민해왔던 미궁 같은 삶의 문제들이 불교의 교리적인 체계를 공부함으로써 풀리기 시작했다. 삶의 이치가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십 년의 정신의 방황이 갑자기 불 옆 얼음조각처럼 녹기 시작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유를 살아야 되는 당위를 찾아낸 것이다. 당위의 필요충분조건 그것은 바로 수행이었다. 굳이 우리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고 혹은 진여와 생멸문이 있다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나의발견은 충분히 위안이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나의 존재문제는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나의 존재문제는 보잘 거 없이 작아져 버리니 그동안 괴롭혀왔던 니힐은 서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천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실천은 순식간에 진행 되었다. 실천에 의문을 두지 않은 것은 순전히 교리공부 때문이었다. 지속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했었고 확인하기 위하여 억지를 부려야 했었다. 철저히 시간의 틀속에 가두어 시험 해보기도 하였다.

그동안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찾았던 자신을 보며 무수히 일어나는 생각을 보기 시작했다. 생각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삼세를 왕래하고 신기루에 매달리기도 하며 무의식의 기억을 넘나들곤 하였다. 때로는 생각이 생각을 낳아 더 큰 망상을 일으키기도 하며 주체할 수없는 갈등에 힘들어 하기도 하였다. 남들이 그 시간에 돈을 벌고 영화를 보고 골프를 치고 여행을 가고 공부를 하였다면 나는 그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나는 변해가기 시작했다. 긴 시간을 혼자 있어도 지루해하지 않았고 어둠이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시간을 아까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오는 새로움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대상은 경이가 아니라 쫓아 내야할 번뇌이었다. 좋아하던 책들도 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끄달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니 그것은 진실로 묘한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즐거움과 말할 수없는 편안함이 찾아왔다. 수많은 생각은 정리되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던 생각의 정체는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 필요하다고 요구되는 곳에 붙여진 욕구의 문제였다.

그러나 정녕 욕구의 문제는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오는 갈등의 문제였다. 욕탐의 문제였던 것이다. 욕구가 일어나도 욕탐만 붙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이성의 한계를 절실히 느낀 것은 참선의 힘이었다. 커피생각이 일어나면 커피의 정체는 어김없이 나타난다. 커피생각을 하지 않으면 커피의 정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욕구가 일어나면 어디서 왔는지 현상이 생겼다가 욕구가 없어지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현상이라면 과연 욕구를 일으킬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란 실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현상이란 인연따라 나타나면 실재 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인연따라 사라지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현상이란 조건이 만들어낸 허망 한 것 이다. 커피는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법인 것이다. 즉 커피 현상은 마음이 만들어낸 허망한 것이었다.

나는 왜 그동안 이 허망한 것에 집착 하였던 것일까? 커져버린 비밀은 내 삶을 죽 잡아 늘어뜨려 놓았다. 생각의 홍수 속에서 수해를 입는 일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의 강물은 낚시하는 일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은 아무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으니 마음은 욕탐으로부터 탈출되고 더 이상 마음은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 마음은 구속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구속 받을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자유 아닌가. 이제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야할 먼 길이 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묻는다. "왜 내가 산속에 오래 있었는 줄 알겠제~"

(글쓴이 : 월간불광 박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