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의 네 가지 덕(사덕, 四德)이 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 그런데 <아함경> 등에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등을 언급한다. 앞서 삼법인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수행법인 사념처(四念處)에서는 무상, 고, 무아, 부정(不淨) 등을 언급한다. 이러한 무상, 고, 무아, 부정 등의 가르침만 접한 경우, 혹은 이러한 가르침만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열반의 사덕인 상락아정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오히려 외도의 가르침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다.
경전에 ‘일체법’이라 언급하지만, 문맥에 따라 일체법은 모든 법을 의미하지 않고 유위법을 지칭할 때도 있다. 법에는 크게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있다. 유위법은 분별 망상으로 드러난 세상을 말한다. 무위법은 분별 망상이 사라진 열반, 진여를 말한다. 유위법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고, 무위법은 불생불주불이불멸이다(<잡아함경> 제12권 심심경)
생주이멸하는 유위법은 무상, 고, 무아, 부정인데도 범부는 상, 락, 아, 정이라고 전도된 집착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집착을 깨뜨리고자 일체법이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고 강조한다. 사념처 역시 방편으로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각각 부정,고,무상,무아로 관한다. 사념처는 오늘날 위빠사나 수행에서 강조한다.
ⓛ 신념처(身念處)다. 몸 가운데 깨끗하지 못함(不淨)을 보고, 깨끗하다(淨)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린다. ② 수념처(受念處)다.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등 세 가지 느낌(受)은 모두 고(苦)라고 보고, 즐겁다(樂)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린다. ③ 심념처(心念處)다. 마음이 연을 따라 찰나에도 머물지 않고 찰나에 일어나고 찰나에 사라짐을 보고, 항상하다(常)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린다. ④ 법념처(法念處)다. 위의 셋을 제외한 다른 법에 대하여 실체가 없으며(無我) 또 ‘나(我)’라거나 ‘나의 것(我所)’이라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음을 보고, 나(我)라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린다.
이렇게 살펴봄으로써 유위법에 대해 깨끗하다(淨), 즐겁다(樂), 항상하다(常), 자성이 있다(我)는 전도된 생각을 깨뜨린다. 그런데 무상,고,무아,부정의 가르침을 듣고서는 ‘무위법(열반, 진여)은 상락아정’이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쉽게 생각해보자. 과연 부처님에게 고가 있는가? 늘 열반에 계신 부처님도 고가 있다면 굳이 성불하고자 수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열반은 안락(安樂)이다. 몰아붙임과 괴롭힘(핍뇌, 逼惱)이 없기 때문이다. 청정법계인 진여는 뭇 모습이 고요하다. 그러므로 안락이라 한다. 열반은 다하는 때가 없다(무진, 無盡). 청정법계는 무생무멸(無生無滅)로 성품이 바뀜이 없으므로 상(常)이라 말한다. 늘 그러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청정법계인 진여와 함께하는 부처님은 결코 분별 작용에 의해 조작되거나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고(상), 분별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고통과 번민이 없기 때문에 즐겁고(락), 모든 희론을 떠나기 때문에 참된 모습 그대로이고(아), 번뇌와 근심으로 인한 더러움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깨끗하다(정). 열반의 네 가지 덕인 상락아정을 접할 때마다 하심의 필요성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