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육신마저 소멸한 상태를 무여의열반이라 말한다.
[불교신문 2024.06.17.]
초기불교에서는 열반을 대략 두 가지로 구분한다.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다. 부파불교의 논서인 <대비바사론>제32권에 따르면, 초기 경전에서는 이 두 열반을 언급하였으나 자세히 분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두 열반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대개 유여의열반은 수행 정진으로 번뇌는 끊었으나 아직도 과거의 업보로 받은 육신(肉身)이 소멸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이 육신마저 소멸한 상태를 무여의열반이라 말한다. 그리하여 ‘무여의열반에서 반열반한다’는 경전 말씀에서 육신마저 소멸한 상태인 죽음으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반열반에서 ‘반’은 범어 파리(pari)의 음사로서 ‘완전하다’는 뜻이다. 한편 파리(pari)는 ‘들어간다’는 뜻이 있으므로 반열반을 입멸(入滅)이라 한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구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45년 동안의 부처님은 어떻게 되는가? 육신이 있는 한 완전한 열반이 아닌가?
<대지도론>제39권의 의하면, “탐애 등의 모든 번뇌가 끊어지면 유여열반이라 하고, 성인이 이 세상에서 받은 바의 오중(五衆)(오온, 오음)이 모두 다하여 다시 받지 않게 되는 것을 바로 무여열반이라 한다.” 오온(五蘊, 색수상행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또 여러 의견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 오온을 마음 작용으로 이해한다.
색수상행식이라는 마음 작용으로 나의 삶과 세상이 펼쳐진다. 마음 작용으로 온갖 분별과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 온갖 분별과 괴로움은 집착 등의 번뇌로 반복해서 일어난다. 집착 등의 번뇌가 사라지면 모든 분별과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참으로 고요하다. 분별이 사라진 상태, 고요하다는 말조차 끊어진 상태, 그러면서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는 상태다. 열반이다. 부처님은 늘 적정(寂靜)한 상태에서 중생과 함께하신다. 그런데 모든 분별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중생과 함께할 수 없다. 법을 설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고, 다른 의미로는 분별이다. 그렇지만 늘 평온하고 늘 그 자리다. 마음의 동요가 없다.
<섭대승론석>제12권, 또는 원효 스님의 <열반경종요>에 인용된 <금고경>에 의하면, “화신은 유여의열반이고, 법신은 무여의열반이다.” 법신은 진리 그 자체 법(法)을 부처님으로 한다. 진리 그 자체의 부처님이다. 중생을 위해 몸을 나투신[화(化)] 부처님이 화신이다. 법신은 모습으로 나타낼 수 없다. 진리 그 자체는 형태나 언어,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자비심으로 중생을 위해 화신으로 나타난다. ‘중생과 함께하고자 분별을 일으키고 말씀하는 순간’이 화신이라 한다면, ‘분별이 사라진 상태, 고요하다는 말조차 끊어진 상태, 그러면서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는 그 자리’는 바로 법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분별없는 그 자리(법신)에 머문 것이 무여의열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다시 모습을 나타내고 분별을 일으키는 것(화신)이 유여의열반이다. 두 열반의 차이는 우리에게는 죽음이나 육체의 유무로 나타날 수 있지만, 죽음이나 육체의 유무가 중심이 아니다. 그렇다고 할 때, 석가모니부처님이 구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셨다는 것은 육체를 버렸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분별없는 그 자리에 드셨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