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일체의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을 말한다.
[불교신문 2024.06.07.]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열반이라는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성냄이 영원히 다하며,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하고, 일체 모든 유루(有漏,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이니, 이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잡아함경> 제18권
‘열반’은 범어 니르바나(nirva)을 음역한 것으로, ‘불어서 끄진’, ‘불어서 없어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불어서 끄진, 혹은 없어진 것이 무엇일까?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번뇌다. 즉, 열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번뇌를 불어서 끈 상태, 타오르는 번뇌를 소멸시키고 깨달음의 지혜인 반야를 얻은 상태를 말한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는 참으로 고요하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한다. 열반은 고요하기도 하지만 밝기도 하다. 적조(寂照)다.
그런데 ‘열반’을 죽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열반을 죽음으로 생각한 서양 학자도 있고, 죽음을 통해 열반이 완성된다고 보는 이도 있다. 경전에서 열반을 죽음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부처님이 45년 동안 가르침을 펴시고 구시나가라에서 돌아가실 때를 ‘열반’이라 한다. 그런데 만약 부처님의 죽음이 열반이라면 죽음 이전의 부처님 삶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열반인가, 아닌가?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순간부터 늘 열반에 계셨다. 그렇다면 보리수 밑에서 깨달았을 때를 열반이라고 하면,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를 왜 또 열반이라고 하는가?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를 ‘무여의열반에서(으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표현한다. 이에 열반을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열반의 구분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보통 간단한 해석은 이렇다. “번뇌는 끊었는데 아직 육체는 있으므로 ‘나머지 의지할 것[여의(餘依)]’이 있다는 뜻에서 유여의열반, 이 몸마저 버렸을 때를 무여의열반이다.” 이러한 풀이는 육체의 유무가 중심이다. 이러한 풀이는 두 열반을 구분하기는 쉽다. 육체가 있으면 유여의열반, 죽음으로 인해 육체가 사라졌으니 무여의열반이다. 이러한 풀이를 전제로 혹은 육체를 마지막 장애로 보고서는 죽음으로 열반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또 다른 풀이가 있다. 원효 스님 <열반경종요>를 보면, 열반에 대한 여러 견해를 언급하는 가운데 “무여의열반은 몸이 사라진 후에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일체 번뇌를 끊어 없애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 스님이 이렇게 말하지 않고, 몸과 생각이 모두 사라진 이때를 무여의열반이라 말하는 것은, 세속의 말에 따라 경문을 믿게 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사실 육체의 유무로 정리하면 평범한 이들에게는 깔끔하다. 그러나 이 경우 앞서 언급한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여러 고민은 남는다. 원효 스님도 육체의 유무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렇게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을 육체의 유무로 구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 하나의 견해가 마음 작용의 유무다. 다음 글에서 마음 작용의 유무로 두 열반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