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미셀러니

불교 교리 산책 (목경찬) 15. 왜 있는데 없다고 하지?

작성자
hhhh
작성일
2025-07-27 22:15
조회
185
 

<15> 왜 있는데 없다고 하지?


[불교신문 2024.04.19.]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때, 믿음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본다. 그리고는 그 가르침에 대해 왜 그렇지? 하는 의문을 가진다. 그 의문이 계속 가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 해결되기도 한다. 그런데 해결되었다고 여기는 그 부분도 어느 날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직도 공부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가르침도 그렇다. 무아(無我)라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공(空)으로 이어진다. 그 가르침을 처음 접할 때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있는데 없다고 하지? 분명히 보는 나도 있고 나에게 보이는 세상도 있는데, 왜 없다고 하지?’

<잡아함경> 등 경전에서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 또는 ‘무상(無常), 고(苦), 공(空), 비아(非我)’라는 구절처럼 무아(無我)를 비아(非我)로 표현하기도 한다. 둘 다 범어 안아트만(anatman) 또는 빨리어 안아탄(anattan)의 번역어다. 아트만(atman) 또는 아탄(attan)은 아(我)로, 안(an)은 부정사(不定詞)로서 무(無) 또는 비(非)로 번역한다.

이렇게 단어를 분석하는 이유는, 근래 학자들이 무아와 비아에 대해 그 의미를 구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무아는 ‘아가 없다’는 뜻으로 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의미가 강하다면, 비아는 그것이 ‘아는 아니’지만 다른 아는 있다는 의미로 본다.

물론 ‘없다’와 ‘아니다’의 뜻이 반드시 구별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여자만 있는 방에 가서 ‘남자가 없네’, ‘남자가 아니네’ 하는 말은 모두 다른 곳에 여자가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토끼 뿔은 없다’, ‘토끼 뿔이 아니다’는 말은 모두 토끼는 뿔이 없다는 사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학자들이 무아와 비아를 그렇게 풀이하는 것은 대승불교에서 언급하는 불성, 여래장 등의 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잡아함경>에서 무아, 또는 비아를 사용하였듯이,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가르침에서 무아도 비아로 풀이할 수 있다. 친구 집에서 내가 본 수건은 수건이라는 ‘자성(我)이 없다(無)’ 하거나, 또는 내가 수건이라고 보았을 뿐이지 ‘수건이 아니다(非)’ 할 수 있다. 그것은 친구에게는 걸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끔 무아나 공에 대해 이렇게 이해한다. 저 앞에 세상이 펼쳐진다. 수건이다, 걸레다, 달콤한 물이다, 해골 물이다. 등등 분별하여 세상을 본다. 무아나 공의 가르침은 ‘인연화합으로 저 앞에 드러난 것’마저 전혀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인연화합으로 있다. 그러나 ‘저 앞에 그렇게 실제 있다고 보는 것’은 없다(無). 저 앞에 내가 보는 것처럼 실제 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착각이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있지 않다(非).

이때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난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면, 세상의 참모습이 어떠하다는 말인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인연화합이라고 하는데 인과 연은 어떻게 되지. 이러한 의문 속에 불성, 여래장, 법신 등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언어는 한계가 있다. 경전 말씀이라도. 혹시 무아라는 용어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내 생각대로 무아를 이해하여 다른 견해를 넘겨짚지는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