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무신론인가, 유신론인가? 보통 ‘무신론’이라는 답이 먼저 나온다. 그러면 어느 누가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불교가 무신론이라면 불교에 등장하는 천신, 용신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답하기 전에 신(神)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질문자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세상을 창조한 절대신을 규정하여 신이라 한다면 불교에서는 그러한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신을 규정한다면 불교는 무신론이다. 그러나 인간보다 신통한 능력을 지닌 이를 신이라 규정한다면 불교는 그러한 신을 인정한다. 천신, 용신이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신도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이다. 그런 의미로 신을 규정한다면 불교는 유신론이다. 불교에서 천신, 용신 등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는 불교는 무신론이다. 다시 말하면 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대답은 다르다.
모든 용어가 마찬가지다. 같은 말인데 다른 뜻일 수 있고, 다른 말인데 같은 뜻일 수 있다. 그 대화에서, 그 문장에서 그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같은 용어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대화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대화가 아니다.
교리 공부도 마찬가지다. 용어의 뜻을 다르게 규정한다면, 같은 경전을 보아도 다르게 이해하기 마련이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가장 오해하는 용어가 ‘마음[心]’이 아닐까 한다. 보통 마음을 생각, 의지, 관념 등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그런데 불교에서 마음은 ‘적집(積集)’의 의미도 있다. ‘모으다’는 뜻이다. ‘저장’이라 이해하면 편할 듯하다. 인도말 찌따(citta)를 심(心)으로 번역하는데, 이 찌따의 뜻이 바로 적집이다. 어쩌면 이 적집의 개념이 불교의 마음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출퇴근길을 알고 매일 출퇴근을 할까? 출퇴근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알고 있는 출퇴근길의 정보는 어디에 있는가. 내비게이션이 안내할 경우 그 정보가 시스템에 저장되어 있듯이, 우리에게도 어딘가에 그 정보가 저장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처럼 살아온 환경에서 습득한 내용(정보)이 어딘가에 저장되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이라 한다.마음은 우선 저장의 기능이 있다.
개가 짖으면 왜 우리나라 사람은 멍멍 짖는다고 하는데 미국 사람은 바우와우 짖는다고 할까. 우리나라 사람은 개가 멍멍 짖는다고 하는 환경에서 자랐고, 미국 사람은 바우와우 짖는다고 하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각각 그러한 환경에서 습득한 멍멍 또는 바우와우라는 정보가 마음에 저장되고, 또 개가 짖는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면 그 저장한 정보가 드러나 개가 멍멍 또는 바우와우 개 짖는다고 한다. 그런데 개가 실제 뭐라고 짖는지는 모른다. 단지 마음에 저장한 멍멍이라는 소리를 개 짖는 소리에 덧칠하여 그렇게 들을 뿐이다. 멍멍 듣고자 하여 멍멍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다. 즉 나의 의지나 생각으로 멍멍 들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저장한 내용이 그렇게 드러난 것뿐이다. 이때 마음은 저장의 기능에 더하여 생성의 기능이 있다.
원효스님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것을 알고서는 왜 구역질을 하였을까? 마음은 저장과 생성의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