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제법무아(諸法無我) [불교신문 2024.03.12.]
제법무아는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하나로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법(法)은 세상 만물, 사물, 인식 현상이고, 아(我)는 실체, 자성이다. 이때 간단하게 글자 풀이만 하면,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은 그 자체라고 할 고유한 성품,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연기법으로 설명한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있으므로 실체가 없다. A+B+C=D라면, D는 실체가 없다. A, B, C가 관계하여 임시로 D가 있을 뿐이다. A, B, C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D는 있을 수 없다. 인연이 관계하여 있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 이처럼 모든 것은 인연으로 있을 뿐, 그 자체가 실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제법무아다.
예를 든다. 컵은 컵이라고 할 고유한 자성이 없고, 물은 물이라고 할 고유한 자성이 없다. 왜 그러한가, 분명히 내 앞에 컵이 있고 물이 있는데 말이다. 대부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단지 인연에 의하여 컵이 있고, 물이 있을 뿐이다. 여러 흙 알갱이가 모여 컵이 되고,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져 물이 된다. 컵, 물은 인연화합으로 있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설명에 이해된 듯하다. 그러나 부족하다. 이전에 언급한 외연기와 내연기를 상기하자. 외연기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고, 내연기는 마음 작용 간의 관계다. 컵이 알갱이로 이뤄졌다거나 물이 산소와 수소로 되었다고 하는 설명은 외연기의 관점이다. 그럼 내연기로 설명해보자.
내 앞에 보이는 컵은 마실 물을 담을 수 있는 도구로 지금 사용하고 있으므로 나에게 컵으로 드러난다. 그 자체가 컵은 아니다. 어느 순간 연필을 담는 필통이 될 수 있고, 꽃을 꽂는 꽃병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컵인가, 필통인가, 꽃병인가. 그 자체에 컵, 필통, 꽃병이라는 자성이 있지 않다. 관계 속에서 그렇게 드러날 뿐이다. 제법무아다.
물은 예로부터 일수사견(一水四見)으로 많이 인용하였다. 사람에게는 물로 보이는 것이, 하늘 중생에게는 보석으로, 아귀에게는 피고름으로, 물고기에게는 집이나 길로 보인다고 한다. 만약 물이 물이라는 실체나 자성이 있다면 모든 중생에게 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업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따라서 내 앞에 보이는 물은 물이라는 자성이 없다. 나와 관계 속에서 물로 보일 뿐이다. 제법무아다.
이러한 내연기 설명에 이렇게 반박한다. ‘하늘 중생에게는 보석으로, 아귀에게는 피고름으로, 물고기에게는 집이나 길로 보이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그래서 ‘보인다’고 하지 않고 ‘보인다고 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 말은 비겁한 핑계다. 그래서 다시 예를 든다. 그럼 개 짖는 소리나 열차 소리는 어떤가. 우리에게는 ‘멍멍’, ‘칙칙폭폭’으로 들리는 소리가 미국인에게는 ‘바우와우’, ‘추추’로 들린다. 같은 개 짖는 소리, 같은 열차 소리인데 말이다. 그것은 각각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는 ‘멍멍’ 짖는다고 하는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멍멍’으로 들릴 뿐이다. 한편 ‘칙칙폭폭’하는 증기기관차도 없는 오늘날에도 열차 소리는 ‘칙칙폭폭’이라고 하니, 업은, 고정 관념은 참으로 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