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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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과의 인연 : "나한테 쏙지마레이" (박경훈)

작성자
hhhh
작성일
2018-10-05 22:31
조회
964

"나 거짓말쨍이다, 나한테 쏙지마레이"  (박경훈)


 

<첫만남>

“니 머하러 왔노. 나 보러 왔제. 나 거짓말쨍이다. 나한테 쏙지 마레이. 장바닥에 좌판패논 야바위군이다. 니 나한테 쏙지마레이”

스님은 처음 만나는 내가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소위 당신의 좌판을 펴 놓기 시작하였다. 스님이 펴는 좌판 위의 물목(物目)에 따라서 종횡무진으로 옮겨 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 성전암에 갈 때는 잠시 인사만 드리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성전암을 찾아간 때도 오후2시였다. 4시가 되면 스님이 참선을 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님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한여름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내가 처음 성철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스님의 성미가 대단히 괴팍스럽고 또 수좌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차고 엄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원군으로 종수 스님과 도일 스님, 그리고 백운 스님과 함께 갔던 것인데 전혀 뜻밖이었다. 조금도 엄하지 않고 괴팍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박학다식하고 동서양의 학문에 밝은 자상한 호사승(많은 수행을 쌓은 훌륭한 스님)의 인상이었다. 그리고 선승답지 않게 여러 가지 방면에 대단히 관심이 많으셨다.

스님은 나에게 왜 중이 되었느냐고 물으셨다. 취직하고 장가들어서 자식도 낳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아무 쓸모없는 중노릇은 무엇 때문에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견성하기 위해서 출가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님은 “교만하다. 그 교만을 떨쳐버려야 견성이든 성불이든 한다”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성철스님 이외에도 많은 사람에게서 교만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터였다.

나의 은사 스님은 금(金)자, 오(烏)자, 금오 스님이시다. 나는 은사 스님께도 교만하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사미계를 받고 월탑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리고 스님은 유찬(幽燦)이라는 호를 따로 지어주셨다. 유찬이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안으로 그윽하게 빛나라는 뜻으로, 교만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늘 중은 하심(下心)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은사 스님께서 으레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간곡히 이르시는 당부가 담긴 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호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도 월탑보다는 유찬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또 나에게 화두를 주신 효봉 스님과 비구계를 설해주신 동산 스님께서도 나의 교만을 걱정하셨다.

이같이 종종 교만함을 지적받는 나로서는 성철 스님께, 그것도 첫 대면에서 교만하다는 지적을 또 받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자연히 입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30 여 년 동안 스님과 나 사이에는 이 교만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교만으로 인해서 입이 얼어붙은 나를 두고 스님은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것을 물으셨고, 그 중에는 심령현상도 있었다. 이것 또한 일반적으로 선사에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들, 그리고 종횡무진한 스님의 이야기에 팔려, 우리는 일어설 때를 놓치고 말았다. 스님은 사시에 한 끼만을 드시고 오후에는 공양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저녁을 굶을 것도 걱정이었다. 게다가 성전암에는 우리 넷이 잘만한 방이 없으니 어두워서 큰절로 내려가야 할 일 또한 걱정이었다.

이런 속을 읽으셨는지, 스님은 시봉하는 행자에게 저녁을 짓게 하셨다. 그 무렵, 성전암에서 저녁 공양을 짓는 일 또한 흔한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오후 참선을 마치면 고구마 두어 조각으로 허기를 달랬다. 시봉하는 행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도 오후 불식을 했다. 그러니 그곳에서 저녁을 지어 먹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백팔참회>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정화의 기운을 타고 禪이 크게 번지고 있을 때, 선방에서 결제를 마친 수좌들은 여러 곳으로 눈 밝은 선사를 찾아가 자신이 닦은 수행의 경지를 점검받는 관습이 성행하였다. 그것을 흔히 법을 묻는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당신에게 법을 물으러 찾아오는 수좌에게 백팔참회를 요구했다. 여기에는 업장의 소멸을 장려하고자 하는 뜻뿐만 아니라 법을 묻는 수좌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백팔참회로써 확인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농담삼아 달마를 찾아간 신수가 팔을 잘라 믿음을 보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싸다고도 하셨다. 그러나 그 농담 속에는 잡인을 금하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자연히 백팔참회를 하기 싫은 수좌는 성철 스님을 꺼려하고 찾아가지 않았다.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막는 철조망이나 백팔참회는 그 점에서 스님의 뜻에 부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백팔참회는 수좌들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파장이 자라고 있었다. 스님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백팔참회가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1000배를 하는 신도들이 생기고 더 나아가 3000배를 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3000배를 하지 않으면 스님을 만나뵐 수 없게 되었다. 스님은 곧잘 불공을 드리기 위해 절에 온 신도들에게 진정한 불공은 마을에 내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과 옷을 주는 것이라고 하고, 절은 절을 하는 곳이며 불공보다도 참회하는 절을 하는 곳이 절이라고 가르쳐 절하는 풍토가 자리 잡히게 하였다.

 

<대능엄주>

대능엄주란 숙서의 습기를 없애는 진언으로서 <능엄경>에서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 <능엄경>은 한국 전통불교, 특히 선종의 소의경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가에서는 <능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대능엄주를 외우지 않고 예부터 해인사에 따로 전해오는 판본의 대능엄주를 외워왔다. 이 판본의 대능엄주는 <능엄경>의 대능엄주와 내용이 다르고 우리나라 소리로 되어 있으며 510구이다.

성철 스님은 이 대능엄주의 소리가 잘못 음사되어 있고 전체 내용에 있어서도 결함이 많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의 내용을 채우고 소리를 바르게 음사하는 일에 수년 동안 몰두하였다. 1950년대 당시는 외국으로부터 필요한 자료와 도서를 구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스님은 손이 닿는 온갖 경로를 통하여 대능엄주에 관한 자료와 도서를 국내외에서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자료 수집에 도움을 준 사람 중에는 벽안의 독일일 의사도 있었다. 그는 독일에서 파견된 의사로 한국전쟁 때 부산에 머무시던 스님의 병을 치료하면서 스님과 인연을 맺고, 스님의 병력을 독일 의학계에 보고하였다. 독일로 돌아가서도 스님과 서신을 교환하던 그 의사는 인도와 뮌헨대학에 있는 자료를 스님께 보내주어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술회를 들은 적이 있다. 특히 뮌헨대학의 자료 중에는 한자, 범어, 서장어, 독일어의 4개 국어를 대조한 것이 있어서 우리 소리로 다라니를 음사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이 일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스님은 인도 현지에 가서 범어를 배워올 사람이 있으면 학비를 대겠다고 했고, 실제로 여러 사람에게 인도에 가서 공부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있는 힘을 기울여 완성한 대능엄주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새로 음사한 대능엄주를 외울 것을 주장하는 입장과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대하는 입장은 예부터 전해오는 것을 뒷사람이 함부로 버릴 수 없고, 예부터 전해온 대능엄주가 잘못되었다면 대능엄주만이 아닌 지금까지 한국불교에서 외워온 다른 모든 다라니들도 잘못 외워왔을 것이므로 그 영향은 다라니에 그치지 않고 의식 전체에 미쳐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행해온 의식과 다라니의 공덕을 뿌리째 흔들고 부정하는 결과가 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는 당시 불교진흥원 황산덕 이사장의 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불교진흥원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의식집을 만들 때도 그와 같은 이유로 다라니의 음사가 문제되었다. 그는 다라니를 새롭게 음사해서 외우는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보다도 더 큰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스님과의 노상대면>

성철 스님은 당신이 직접 전화를 거는 것은 물론, 받는 것도 싫어하셨다. 그것은 당신의 짙은 사투리와 빠른 말씨 때문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스님의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면 중언부언해야 하고, 또 상대방이 잘못 알아듣고서 오해할까 봐 전화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보통은 시자나 옆에 있는 사람이 전화를 중개하기 마련이다.

4.19혁명이 일어난 해 초가을,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우연히 스님을 만났다.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부산에 오셨는데, 막 치과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셨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부산의 날씨는 노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스님은 두루마기를 입지 않은 동방 차림이었다. 마치 잠깐 문밖을 산책하는 그런 가벼운 느낌을 받았다. 어디 가까운 그늘에 들어가 쉬면서 스님께 무엇이든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은 한사코 사양하셨다. 그 이유인즉슨, 우리는 만날 계획이 없이 우연히 만났고 나에게는 이미 계획된 일이 있을 것이므로, 우연한 만남을 위해서 나의 계획된 일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친구와 술 마시는 일뿐이라 상관없다고 말씀드려도, 그것도 어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일 일본 서점에 볼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시면서 당신이 묵고 계시는 곳의 전화번호를 일러주셨다.

다음날, 오전 11시경에 전화를 걸었다. 주인인 듯 한 부인이 받기에 스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주인은 스님께서 공양을 하고 계시니 무슨 이야기인지 전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과의 약속을 말하고 언제쯤 그곳에 가면 좋을지 스님께 여쭤 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내 귓전을 때린 목소리는 뜻밖에도 스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먼 곳에 있지 않으면 지금 오라는 말씀이었다. 집 주인에게서 위치를 물어 찾아간 곳이 부산역 건너편에 있는 여관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두어 명의 보살들이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보살이 나를 보더니 자기들의 전화는 받으신 적이 없는데 이 처사는 어떤 사람이기에 직접 전화를 받으시냐고 물었다. 그리고 보살들은 스님이 직접 전화를 받으시기에 대단한 인물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깡마른 젊은이가 나타나서 적이 실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님이 유찬거사는 대단히 교만한 사람이어서 당신이 직접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셨다. 여전히 의아해 하는 보살들의 배웅을 받으며 스님과 나는 여관을 나왔다.

스님은 어제와 같이 동방 차림이었다. 우리는 광복동에 있는 일본 서점까지 걸어갔다. 당시 광복동에는 일본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 몇 군데 있었다. 이들 서점들이 취급하는 일본 서적은 대부분 일본을 왕래하는 선원들이 들여온 것들이었다. 정식으로 무역을 통해서 들여오려면 시일이 3-4개월은 걸리기 때문에 주문받은 책을 선원에게 부탁해서 들여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날 스님은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책을 찾으러 일본 서점에 가신 것이었다. 그때 스님이 주문한 책은 밀교에 관한 책 2권이었다고 기억한다.

집념을 갖고 대능엄주를 널리 편 것만을 보아도 스님이 밀교에 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선과 밀교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다. 스님은 언젠가 일부 선객을 자처하는 이들 중에 막행막식하고 방일한 생활을 하며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써 무애의 경지에 도달한 양 뽐내는 풍토가 한국불교계에 생기게 된 것은 선에서 밀교적 요소가 사라진 때문이 아닐까 하신 적이 있다. 내 얕은 생각으로는 밀교행자의 지계가 철저한 점을 염두에 두고서 하시는 이야기로 이해하였다.

 

<대불련과의 인연>

당시 대한불교신문사의 이한상 사장의 후원으로 발족한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의 구도정신은 젊은이답게 뜨거웠다. 그들은 봉원사에 구도부를 두고 그곳에서 침식을 하면서 수행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당시 봉은사 주지 스님이던 광덕 스님이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지도법사였다. 지도교수는 이기영, 서경수, 박성배 교수였다. 그때까지 이 네 분은 성철 스님에 대해서 말은 많이 들었어도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구도부의 수련을 성철 스님 회상인 김룡사에서 갖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스님에 대해서 물었다. 김룡사에 함께 가서 수련회의 개최를 승낙받는 일을 도와 달라고 하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다만 스님께서 흔쾌히 허락할 것이라고만 말하였다.

그 무렵, 성철 스님은 동산 스님의 제자임에도 스승이 정화운동에 동참하라고 권했으나 성전암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동산 스님의 문도들 중에서는 스님을 곱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고, 그런 시각은 정화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교단 안에도 상당히 퍼져 있었다. 광덕 스님도 그러한 시각을 가진 스님들의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광덕 스님에게 직접 만나 보고서 스스로 판단하시라고 했다. 굳이 내가 함께 가지 않은 이유라면 선입견이 전혀 없이 스님을 대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성철 스님을 만나고 온 광덕 스님과 서경수, 박성배 교수는 구도부의 수련을 성철 스님의 회상으로 정한 것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했다. 그리고 서경수 교수는 성철 스님의 동서양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박성배 교수는 수련이 끝나고 성철 스님 앞으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해인사에서 묵언정진까지 하였다. 지금은 환속해서 뉴욕대학의 교수로 있다고 은퇴하였다. 박 교수는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않은가? 함께 출가해서 수행을 하자”고 했다. 그의 제의에 대해서 나는 “나는 박 교수처럼 장가들어 애를 낳아 남편 노릇과 아버지 노릇을 해보지 않았으니, 나는 장가들어 남편 노릇과 애 낳아 아버지 노릇을 해보고 박 교수는 못해본 승려생활을 한 다음에 그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대답하였다.

다분히 농담 섞인 말이지만, 나로서는 다시 출가한다는 것은 위선이고, 정직하게 말해서 고된 수도생활을 감당할 능력이 나에게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환속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성철 스님이 “내가 속았다”고 하셨다는 말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승려 생활이 거짓으로 점철되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어찌 감히 다시 출가하는 일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