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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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향 같이 맑은 위대한 차 (김의정)

작성자
hhhh
작성일
2019-12-12 17:48
조회
861

법정스님은 "차향 같이 맑은 위대한 차"


(김의정)


법정 스님은 차를 좋아한 차인이었다. 묘한 인연의 소치랄까. 한국 다도의 종가 명원문화재단과 길상사는 직선 거리로 3백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틈만 나면 길상사에 들러 옛 생각을 하고는 했다. 오늘도 이른 새벽 한 잔의 차를 들고 찾아간 길상사에 봄꽃이 피고 있었다. ‘저 꽃들에게 나머지를 들어라’라며 법문을 끝내던 스님의 숨결이 내 손끝에 잡혀질 듯이 느껴진다. 내 어머니 명원 김미희 선생께서 복원한 백자 헌 찻잔에 우주의 생명을 담고 있는 차 한 잔을 담아 헌다를 한다. 그리고 1배, 또 1배, 1배…. 그리고 조용히 기도를 한다. “한 잔의 차를 흠향하시고,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십시오.”

길상사 법당 밖 어디선가 봄꽃 피는 소리가 들린다. 천 리 만리 깊은 침묵의 무게를 감싸안은 청량한 차 향기가 법정 스님이 떠난 길상사 곳곳에 퍼져간다. 대도무문의 자유인이 된 법정 스님이 좋아하던 한 잔의 차를 떠올리자 가슴 한쪽에 쌓아두었던 기억의 책장이 열린다. 1970년 초 봉은사 다례헌 시절 법정 스님은 내 본가가 있던 신문로 인근에 있는 종로구 사간동의 법련사에 자주 오셨다. 내 어머니 명원 김미희 선생은 법정 스님과 친분이 매우 깊었다. 지금 송광사 방장인 보성 스님의 소개로 1960년 말 봉은사 다례헌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법정 스님과 ‘차’ 인연을 맺은 후 자주 왕래하고는 했다. 명원 김미희 선생이 봉은사로 갈 때도 있었고, 법정 스님이 신문로 집이나 법련사에 올 때도 있었다. 법정 스님과 명원 선생은 그렇게 자주 만나셨다.

명원 선생께서는 법정 스님을 만날 때 꼭 ‘차’를 선물했다. 차를 너무도 좋아했던 차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무 차통에 담긴 녹차를 손수 비단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싸서 가져가셨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 명원 선생께서는 법정 스님을 만나는 자리에 나를 꼭 데리고 가셨다. 햇차가 나오던 1971년 봄이었다. 그날도 법정 스님께서는 사간동 법련사에 오셨다. 명원 선생께서는 내 손을 잡고 구례 화엄사에서 올라온 햇차를 챙겨 법련사에 가셨다. 명원 선생을 따라가며 나는 혼자 생각했다.

‘오늘도 두 분은 만나면 지긋지긋한 차 이야기겠지. 도통 재미도 없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차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오늘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법정 스님과 명원 선생의 공통 화두는 언제나 ‘차’였다. 법정 스님은 불교의 경전과 <초의선집> 등에 있는 불교와 차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명원 선생은 한국 차 역사에 존재하고 있는 궁중 다례나 접빈 다례복원 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시는 것이 아닌가. 물끄러미 한참을 쳐다보던 법정 스님은 사람을 시켜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나를 가까이에 불러 앉혔다.

“작은 보살은 이름이 무언가.”

“의정이라고 합니다.”

“작은 보살은 차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어머니께서 차는 간을 맞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식의 간을 맞추듯 인생의 간을 맞추는 것이 바로 차라고 하셨습니다.”

대답을 들은 법정 스님은 파안대소를 했다. 그리고 붓을 들어 한 획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쓰셨다.

‘홀로 마신즉 신기롭더라.’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차는 여럿이 마시는 것이 좋은데. 왜 혼자 마시는 것이 좋다는 걸까. 참 이상한 스님이네.’

그런 내 생각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스님은 빙긋 웃으면서 그림을 내게 주시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법정 스님을 가끔씩 뵐 수 있었다. 그때마다 빙그레 웃으시며 아는 체를 하셨다. 법정 스님이 써 주신 글귀를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한국 다도의 선구자로 문화관광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은 명원 김미희 선생의 뒤를 이어 명원문화재단을 이끌면서부터 나는 종종 법정 스님이 써 주신 글귀가 차인의 삶을 걸어야 하는 내 인생을 미리 예견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 예절, 우리 전통 다도를 복원하고 보급하는 일은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을 쌓는 것처럼 어려웠다. 국적 불명의 일본식 차 예절, 퓨전식 차 예절, 창작이라는 이름이 붙은 차 예절 등 검증되지 않은 차 예절이 한국 차계에 범람할 때 명원 선생께서 어렵게 복원해내신 우리 전통 다도와 예절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진정한 차인을 만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한복을 입고 과시하는 차인, 값비싼 차 도구와 차실을 자랑하는 차인, 오로지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차 단체장을 하는 차인 등을 만날 때마다 나는 ‘차문화 운동을 하는 것은 ‘평화와 상생’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전쟁을 치르듯 20여 년을 보낸 후에야 겨우 명원 선생께서 복원하신 우리 전통 예절과 전통 다도의 맥을 차인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알아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를 슬프게 한 것은 우리 전통문화의 복원과 보급에 앞장서야 할 ‘정부’의 무관심이었다. 우리 전통 예절과 차 문화는 청소년들의 심성을 맑게 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할 텐데 음주 문화와 쓰레기만 양산하는 문화 축제에 재정을 지원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 번 힘이 빠졌다.

청소년 차 문화대전, 세계 들차회, 경복궁 차회 등 수많은 차회를 하면서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만 치러내야 하는 현실이 너무도 아프고 힘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법정 스님이 주신 글귀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1990년 말 명원 김미희 선생께서 온전히 혼자서 시주를 하셔서 창건한 송광사 불일암을 홀로 방문했다. 송광사 불일암은 너무도 깨끗했다. 먼지가 내려앉을 틈새도 없을 만큼 깨끗한 주방과 차실에서 나는 청량한 차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불일암의 해우소였다. 주변 경관과 너무도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해우소에서 자연미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또한, 낙엽을 이용해 자연 발효의 지혜를 이용해낸 해우소는 깨끗할 뿐만 아니라 냄새조차 없었다. 사방팔방의 천지 이치를 다 소통시키는 위대한 차인의 삶을 나는 그곳에서 보았다. 선가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다선일여’ ‘다선삼매’의 경지를 나는, 법정 스님의 차 살림과 정신을 통해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자연을 담은 차,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담아낸 차 그리고 그 차 정신을 무소의 뿔처럼 꿋꿋이 실천하는 차인의 삶이 제대로 된 삶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법정 스님께서 왜 이런 글귀를 주셨는지 알 수가 있었다. 홀로 마시는 차는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도 모두 놓고 온 우주를 품에 않은 진향을 담은 차 한 잔처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차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뒤부터 나는 홀로 차를 마시는 차인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차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무소유의 정신으로 생애를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법정 스님은 어머니 명원 선생과 함께 나에게 차의 길을 가르쳐준 소중한 스승이다. 그런 스승을 위해 나는 홀로 길상사에서 헌다를 했다. 차향을 맡았는지 봄꽃의 냄새를 맡았는지 경쾌한 새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나는 오늘 우리 시대의 위대한 차인 한 분을 차향에 실어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으로 보낸다. 옴마니반메훔. (출처 :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