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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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주 : 1/5 영혼의 모음(母音) -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법정스님)

작성자
hhhh
작성일
2021-12-28 21:23
조회
500
 

특별기획 : 새해 첫 달, 한 달 동안 다섯 주에 걸쳐  법정스님께서 어린왕자를 읽고 쓰신 저 유명한 '영혼의 모음'을 다시 읽어보는 기회를 가져보겠습니다.

♦ "네가 나한테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이라고 한대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누가 나더러 지묵(紙墨)으로 된 한두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화엄경>과 함께 선뜻 너를 고르겠다. … 지금까지 너를 스무 번도 더 읽은 나는 이제 새삼스레 글자를 읽을 필요도 없어졌다." ♦

 

어린왕자 (영혼의 모음母音)


1-5. 어린 왕자! 지금 밖에서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호에 번지는 하오의 햇살이 지극히 선하다. 이런 시각에 나는 티 없이 맑은 네 목소리를 듣는다. 구슬 같은 눈매를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 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그 눈매를 그린다. 이런 메아리가 울려온다. "나하고 친하자,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어린 왕자! 이제 너는 내게서 무연한 남이 아니다. 한지붕 아래 사는 낯익은 식구다. 지금까지 너를 스무 번도 더 읽은 나는 이제 새삼스레 글자를 읽을 필요도 없어졌다. 책장을 훌훌 넘기기만 하여도 네 세계를 넘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간에 씌어진 사연까지도, 여백에 스며 있는 목소리까지도 죄다 읽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해 전, 그러니까 1965년 5월, 너와 마주친 것은 하나의 해후였다. 너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관계의 바탕을 인식할 수 있었고, 세계와 나의 촌수를 헤아리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보지 않던 사물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다. 너를 통해서 나 자신과 마주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가난한 서가에는 너의 동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메마른 나의 가지에 푸른 수액을 돌게 했다. 솔바람 소리처럼 무심한 세계로 나를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재임을 투명하게 깨우쳐주었다.

더러는 그저 괜히 창문을 열 때가 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귀를 기울인다. 방울처럼 울려올 네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그리고 혼자서 웃음을 머금는다. 이런 나를 곁에서 이상히 여긴다면, 네가 가르쳐준 대로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난 언제든지 웃음이 나네…."

(법정스님)